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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 에세이

3 1 운동과 임시정부

by 손정 2020. 5. 7.

조선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1919년까지 가혹한 무단정치에 시달립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많은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에게 싼값에 넘기고, 조선인에게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없애 버립니다. 치안은 일반 경찰이 아닌 헌병을 동원해 담당하게 합니다. 조선 사람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만주 등 해외로 떠나기도 합니다. 효율적 자원, 식량 수탈을 위해 철도, 항만 공사가 진행됩니다. 이런 가운데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1917년 러시아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의 독립도 목표가 바뀝니다. 독립해서 조선으로 돌아가자가 아닌 독립해서 새로운 공화제 국가를 수립하자로 말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이 식민지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에 의해 1차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는 그들 스스로에게 맡기자는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되자 조선에서도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1차대전말 일본이 연합국으로 참전 선언하면서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가 아니므로 민족자결주의와는 상관이 없게 되었지만 분위기가 달라진 것 만은 사실입니다.

3.1 운동

1919년 3월1일부터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을 뜻합니다. 분위기는 전년부터 형성되는데 1918년 여운형은 상하이에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합니다. 1919년 1월에는 만주에서 박은식,신채호,김좌진 등이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독립 선언서를 발표합니다. 도쿄에서는 1919년 2월 조선 청년 독립단이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합니다.

해외에서 독립선언의 분위기가 익어 가는 가운데 국내에서 사건이 발행합니다. 고종이 1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심이 동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의 손병희는 최초로 3.1 운동을 기획합니다. 여기에 이승훈 등의 기독교, 한용운등의 불교계 인사, 학생대표가 참여합니다. 원래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로 정했지만,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많아 피하고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 측이 반대하여 3월 1일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실제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학생과 시민들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날 경우 세계 열강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식당인 태화관으로 바꾸고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후 경찰에 자수해버립니다.

기다리다 지친 시민들 중 정재용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만세 운동은 4월까지 서울에서만 64회 57만명이 참여합니다. 3월1일 당시에는 평양, 원산 등에서도 동시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만주, 연해주, 미국까지 확산되고 3개월간 계속됩니다. 박은식의 글에서 내용을 살펴보면 총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인원 202만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된 사람 5만 2770명 이었습니다.

(의미)

첫째는 무단통치에 9년간 숨죽이고 살아 왔지만 조선 국민에게는 독립 의지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둘째는 체계적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 것입니다.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합니다. 결국 3.1 운동의 교훈은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합니다.

셋째는 허울뿐이지만 일본의 통치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넷째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아시아 민족운동에 자극을 줍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가 우리가 아는 상하이 임시정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3.1운동 후 연해주에는 대한 국민 의회, 서울에서는 한성 정부,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이 세개는 9월에 하나로 통합됩니다.

행정부는 한성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 의회는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고 이름은 상하이 정부의 명칭을 따르고 장소는 상하이로 정합니다.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정해지지만 나중에 일본 대신 국제연맹에 식민통치를 맡기자고 주장하고 재정을 문란하게 사용하어 탄핵당합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교활동, 채권발행, 신문발간등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재정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후 외교와 무장투쟁에 대한 노선이 달라 분열되고 맙니다.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외롭게 이끌던 김구는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을 키워냅니다.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는 중국 여러 곳을 이동하다 충칭에 정착합니다.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김구가 주석이 됩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기도 합니다. 연합국이 승리할 경우 연합국 지위에서 외교전을 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 영국, 미국과 함께 공동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1943년에는 영국의 요청으로 인도 전선에 참여하여 일본 포로 심문, 일본 문서 번역 등의 활동을 합니다. 또한 미국과 합동 작전을 벌여 조선 국내로 침투하는 작전을 수립합니다. 하지만 실제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하려는 순간, 일본이 갑자기 패망하는 바람에 계획이 실현되지 못합니다. 이때 김구는 깊은 탄식을 합니다. 독립 후 발언권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 왜적이 항복을...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다. 천신만고끝에 참전한 준비를 했건만. 결국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에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다."

손정 인문학 강의 : 한국 근현대사 인문학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