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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 에세이

역사 인문학 강의 - 한국 근현대사 남북 분단

by 손정 2020. 5. 8.

근현대사 - 역사 인문학 강의, 오늘은 남북 분단 과정에 대해 알아 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갑자기 광복이 되긴 했지만 조선의 지도자들은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상하고 독립에 대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운형입니다.

여운형은 조선 건국 동맹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광복이 되자 이름은 건국준비위원회로 바꾸고 여러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건국을 준비해갑니다. 가장 중점을 준 부분이 치안입니다. 전국 각 지역에 치안대, 보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을확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군정을 선언해버립니다.

일본 패망전부터 2차대전 종료후 패전국의 식민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연합국 사이에서는 여러 말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루스벨트는 '한국인은 40년간 훈련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던 사이 소련이 뒤늦게 연합국으로 참여하여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자 미국은 소련의 영향력이 더 커질까봐 38선 분할을 제안합니다.

미국은 애초부터 한국의 독립은 관심이 없고 한반도가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만 했습니다. 따라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도 무시하고 김구의 임시정부도 무시합니다. 또한 빠르고 쉽게 통치하기 위하여 행정 경험이 있는 친일파을 대거 기용합니다. 미국은 남한에서 직접 통치를 시작하고 소련은 북한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간접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활동하던 단체들이 각각 북한과 남한으로 귀국하기 시작합니다.

1945년 12월 남북 분단의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국,소련,영국이 회의를 가진 모스크바3상 회의가 그것입니다. 내용은 조선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4개국에 의해 신탁통치를 한다'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핵심은 임시 민주 정부 수립과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이지 특정한 국가 즉, 미국, 소련 중 어느 나라가 특별히 신탁 통치를 주장했다가 아니었음에도 동아일보의 오보로 소련은 신탁 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독립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나라가 친탁지지와 반탁지지로 나뉘게 됩니다. 좌익은 신탁 지지, 우익은 신탁 반대를 하게 됩니다. 이과정에서 친일파들은 반탁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애국자로 둔갑합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라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를 개최하지만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됩니다. 이틈을 노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합니다. 여운형, 김구 등은 미소공동위원회 중단을 주장하며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를 표명합니다. 이후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디시 열리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남북합작정부를 수립을 주장하던 여운형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는 사이에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력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유엔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여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유엔의 의견을 끌어 내지만 소련의 반대로 북측에는 유엔 임시 위원단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결국 남북한 총선거가 불가능해지자 더 이상 한반도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노력을 더 하지 않고 남측만 선거를 하기로 합니다. 이승만은 찬성하고 김구, 김규식, 그리고 좌익세력들은 반대했습니다. 특히 김구는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만나 협상을 합니다. 또한 전국에서 남한 단독 선거 반대 운동이 벌어지지만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이루어지고 맙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조선 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고 조만식은 조선 민주당을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반탁 운동을 하던 조만식은 소련에 의해 연금당하고 맙니다. 또한 1946년 2월에는 김일성이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됩니다. 위원회는 친일파를 숙청하고 토지 개혁을 실시 하는 등 사실상 북한의 행정을 담당합니다. 1948년 유엔에서 파견한 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한 한것은 사실상 분단의 길을 가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남한이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자 북한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남북은 분단됩니다.

결국 남북이 분단된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자국 이익을 위한 이기심과 이승만, 김일성의 민족보다는 개인의 정권욕을 내세운 원인이 큽니다. 북에서는 조만식, 남에서는 김구와 여운형이 분단을 반대하였지만 알게 모르게 암살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우리 손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로 인해 이루어지면서 발언권이 없어진데에, 분단의 원인이 있습니다. 결국 힘이 없었기 때문이고 없는 힘 가운데 자기 욕심만 차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궁국의 목적, 본질적 목적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조선이 광복되었을 때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조선 국민의 행복이어야 했음에도 수단에 불과했던 이념이 개입되면서 본질과 궁극의 목적이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광복과 함께 단일 독립국을 유지하면서 여러 이념을 가진 세력들이 다당제로 운영되는 중립국이 되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역사의 가정은 없습니다. 다가 오는 미래에는 수단보다 본질을 , 궁극적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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