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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 에세이

그들의 유년

by 손정 2018. 8. 18.

 

저녁 8시

"아빠, 갈색 클레이 다 썼어"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뜻으로 요즘 클레이로 만들기에 푹 빠진 둘째의 말이다.

가장 만들기 쉬운 똥부터 화분,동물을 넘어 요정에 인어까지 그 작은 손에서 생산된다.

 

문구점은 바로 집 앞이어서 슬리퍼 끌고 갔다 와도 5분이면 되지만 한 달동안 이어지던 열대야가 마법처럼 사라진

오늘 밤을 혼자 나가긴 아깝다.

첫째까지 데리고 나섰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야 하늘도 올려다 보는 법.

저게 샛별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으로 가리키며 금성이 지구에서 보인다는 얘기도 나눠보고 짧은 술래잡기도 해본다.

2분거리를 10분이 훨씬 지나 당도한 문구점은 초등학생들에겐 말 그대로 백화점(百貨店)이다.

 

집을 나설때부터 갈색 클레이 하나만 사서 돌아 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안했다. 메모지에 관심 많은 첫째는 벌써

어피치 포스트 잇을 들고 섰다.

"아빠 그냥 뭐 있나 보기만 하는거야" 하며 장난감 코너에 간 둘째는 그냥 보기만 한다는 약속은 지키기 어려워

보인다. 한 발씩 물러선 타협안은 고무줄로 팔찌 만드는 '칼라 밴드 공예 세트'다. 하나에 4000원씩 8000원에

갈색 클레이가 2000원이니까 아이들 둘 데리고 문구점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는데 10000원만 들였으니

성공했다.

 

새로운 걸 샀으니 더 이상의 산책은 없다. 샛별은 그냥 머리 위에 있고 바람은 늘 시원했던 거다.

집에 오자마자 팔찌 만들기를 시작한다. 설명서를 읽는 것은 독해 공부이고 어떤 순서로 고무줄 색깔을

엮을지 정하는 것은 디자인이며 손을 움직여 하나를 완성하기까지는 집중력과 끈기가 필요하니

잘 산거라 믿어본다. 거기다 만들며 재밌다는 말을 연발하니 보는 것만도 흐뭇하다.

 

놀땐 놀아야지 하면서도 놀이에까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나는 가끔 다양하지 못했던 내 유년의 경험을 후회하곤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의 나에게로 가서

이런 경험 해봐라 이런 책 읽어 봐라 말해 주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는 딸들의 유년이 있다. 그들에게는 지금이 바로 자신들의 유년이 아닌가?

타임머신 타령할 게 아니라 이 아이들의 유년은 풍성한가 생각하는게 지금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집앞을 나서면 친구도 없고 나비도 없고 시냇가도 없는 이 곳에서,

학교 마치면 학원과 방문 교사 수업으로 채워진 일정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들의 유년을 채워 줄지 쉽지 않은 고민을 해보는 밤이다.

 

이 마법같은 바람이 내일은 그저 일상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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